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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 이야기

중세 교회의 종교재판중에서 가장 악명 높던 스페인 종교재판을 통한 화형 장면 . 유대인과 무슬림 , 네덜란드 신교도들이 주로 당했다 ./ 위키피디아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는 성 프란치스코 아시시의 가르침을 반영하며, 가톨릭 신자들에게 중요한 상징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 기도가 현대 사회의 현실에 완전히 맞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평화의 기도가 갖는 잠재적인 문제점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평화의 기도 전문을 보겠습니다.

평화의 기도 전문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잘못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게 하소서.  

오,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아멘.

평화의 기도 심층 분석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이 문구는 개인이 평화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이상적인 목표를 제시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개인의 노력만으로 평화를 이루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중세 시기의 십자군 전쟁을 생각해보면, 가톨릭 교회는 평화보다는 오히려 폭력과 전쟁을 통해 자신의 영향력을 넓혀갔습니다.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은 신앙을 앞세워 수많은 사람들을 전쟁으로 내몰았는데, 이는 교회의 평화 추구가 실상 겉치레에 불과했다는 비판을 받게 했습니다. 이처럼, 개인에게 평화의 도구가 되라고 요구하는 것은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가톨릭 교회의 실천과 모순될 수 있습니다.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잘못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게 하소서."**  
이 문구는 이상적인 상황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가톨릭 교회는 종교 재판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박해하고 처형한 사례가 있습니다. 당시 교회는 '진리'와 '믿음'이라는 명분으로 많은 사람들을 억압했으며, 이는 실제로는 미움과 다툼, 분열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 문구는 교회의 역사적 행보와 모순될 수 있으며,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주의를 담고 있습니다.

**"오,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이 문구는 이타주의와 자기희생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이는 피해자들에게 부당한 부담을 줄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부패와 권력 남용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으며, 특히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에는 교황청의 부패가 심각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피해자들에게 이해와 사랑을 강요하는 것은 교회의 과오를 무시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이 문구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실천하기 어려운 이상주의입니다. 특히 용서함으로써 용서받는다는 개념은 피해자들에게 큰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면죄부 판매를 통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많은 이들에게 경제적 부담을 줬습니다. 이는 교회의 부패와 상업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용서를 상업화한 교회의 행태는 이 기도의 메시지와 크게 대조됩니다.

평화의 기도는 많은 이들에게 영감과 위로를 줄 수 있지만, 그 이면에는 모순도 존재합니다. 현실적인 문제와 이상주의 간의 불일치를 인식하고, 교회가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신중하게 접근해야 합니다.